지속된 만남이 세상을 바꿀 때까지

유나
발행일 2024-08-29 조회수 204
FtO

나는 무언가를 만드는 데에 관심이 있다. 내가 만든 결과물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아한다. 시각 디자인 전공자로서 내가 만든 결과물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구현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되며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내가 디지털 서비스 디자인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디지털 미디어는 이용자들과 사회에 폭넓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요코하마로 향하며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미디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도구란 사용자가 어떤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만드는 사람’으로서 나는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공익의 영역에 관심이 있었다. 사회 문제를 비영리적으로 해결하는 사례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던 차에 지도 교수님 소개로 ‘Facing the Ocean’(이하 FtO) 행사를 알게 되었다.

 ▶사회를 맡은 코드포재팬 오거나이저 사야 씨의 ‘Happy Hack!’ 구호와 함께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코드포코리아(Code for Korea), 코드포재팬(Code for Japan), 그리고 거브제로(g0v)에서 공동 주최한 이 해커톤 행사에 총 11개국 출신의 시빅 해커 백여 명이 모여들었다. 디지털 환경에서 펼치는 각자의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세계 곳곳에 이토록 많이 존재한다니! 이 사실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있었다. 오가는 의견 하나, 이야기 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이틀 동안 피곤한 줄도 모르고 끝없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다 보니 함께하게 된

3분 피칭(프로젝트 제안) 시간이 끝나고 사람들이 빠르게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나도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돌아다니다가 ‘여성 질환 예방’을 주제로 제안한 프로젝트 테이블에 멈춰 섰다. 이 프로젝트는 이번 피칭에서 처음 제안된 시작 단계 프로젝트였다. 따라서 FtO에서 실질적인 분석과 연구, 개발을 진행하기 어려웠다. 대신 기존에 짜인 틀이 없는 만큼 지나가던 누구나 가볍게 참여해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테이블 근처에 의자를 놓을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본격적인 ‘해킹’이 시작된 지 한 시간 조금 지나 프로젝트에 중도 참여했는데, 편안하게 논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대만에서 온 프로젝트 매니저가 주도적으로 회의 분위기를 이끌어 준 덕분이었다. 그/그녀는 중간에 구경 온 사람들에게도 진행 상황을 적극적으로 공유해주었다. 다른 곳에 관심이 생긴 사람들은 언제든지 테이블을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간 끝에 기획이 어느 정도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들 서비스의 윤곽이 구체적으로 잡혀가는 단계에 도달했을 때는 5명이 테이블에 남아있었다. 기획 단계에 참가했던 동료들도 중간중간 찾아와 작업이 진행되는 양상을 지켜보고, 자잘한 피드백을 주고 갔다.

▶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있는 Remy 프로젝트.

우리 팀의 구성은 이렇다. 먼저 3분 피칭에서 주제를 제안한 컴퓨터 소프트웨어 전공 대학생 유리와 쿠루미가 있었다. 도쿄에서 대학 졸업반 과정에 있는 그들은 전에도 여성 및 논바이너리 대상의 해커톤 등의 행사를 주최해 본 적 있을 정도로 디지털 환경에서의 성별 격차에 관심이 많았다. 쿠루미는 밝고 적극적인 성격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손 빠르게 필요한 모든 일을 처리해 버려서 다른 팀원들이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일본인 개발자인 토키(Tokky)는 묵묵히 자리에 앉아 개발에 필요한 모든 밑 작업을 도맡아 처리했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늘 차근차근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디자인 팀은 나, 그리고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디자이너 에리얼(Eriol)이다. 에리얼은 특정 기업이 디자인 소스를 독점하고 판매하는 환경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모두가 자료와 작업물을 인터넷으로 자유롭게 공유하는 ‘오픈소스 디자인’ 환경에 큰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에리얼은 ‘Sharing & Talks’ 시간에 오픈 소스 디자인을 소개하기도 했다. 나는 이번에 오픈소스 디자인 도구를 처음 사용해 봤는데, 누구나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데 큰 도움을 줄 것 같았다. 에리얼은 나에게 오픈소스 디자인 도구의 기능을 하나하나 알려주기도 하고, 관련 세미나 정보도 공유해 줬다.

여성 질환 예방을 위한, Remy

우리 프로젝트의 목표는 여성 질환 발생 양상에 대한 의료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해서, 질병 예방을 돕는 여성 맞춤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다. 여성의 건강 상태 변화 추이 데이터를 모아 성별 간 육체적 특성 차이를 고려한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다.

이틀 동안의 짧은 시간 동안 데이터를 모으고 연구를 분석하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먼저 사용자의 건강 정보가 기록, 관리, 수집되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을 구상해 봤다. 논의 결과를 정리하면, 유저는 본인의 건강 상태 정보를 항목별로 저장한다. 축적 데이터 기반의 '리마인더', 즉 알림 기능을 통해 주의할 만한 증상을 예측하고, 대처 방안을 제안해 주는 것이 본 서비스의 주요 기능이다. 건강 상황과 지속적 검사 및 처치 상황을 수집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앱이 기존 변화를 토대로 추후 필요할 수 있는 검사 종류와 시기를 유저에게 추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현 단계에서의 목표이다.

▶시스템의 구조를 화이트보드에 정리하며 소통했다.

우리는 유저가 경험하게 되는 UI와 구성을 꽤 구체적인 수준까지 시각화했다. 대강의 틀이 마련된 다음에는 개발자 토키가 기본적인 개발의 틀과 데이터 구조를 작성했다. 내가 참여한 디자인 팀은 피그마와 비슷한 오픈소스 디자인 도구 펜팟(Penpot)을 활용하여 UI 주요 화면 샘플을 만들었다. 우리는 시스템 구조를 화이트보드에 작성해 놓고 계속 업데이트하면서 소통을 이어갔다. 빠르고 정확한 소통의 결과, 행사 마지막 결과 공유(Final Sharing)에서 간단한 iOS 프로토타입 화면과 함께 주요 UI 샘플까지 선보일 수 있었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

마무리 공유가 끝나고 ‘우리 팀은 정말 좋은 팀'이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우리는 이틀간의 FtO 기간 동안 큰 마찰이나 갈등 없이 부드럽고 빠르게 함께 작업했다. 각국에서 본인들이 경험한 기존 작업을 보여주며 프로젝트에 반영할 만한 지식을 주고 받았다. 

▶프로젝트 중간 공유. 왼쪽부터 유나, 에리얼, 토키. 

Remy 팀원 모두 FtO가 끝난 뒤에도 프로젝트에 계속 참여하자고 뜻을 모았다. 소통을 위한 디스코드 채널을 마련하고 프로젝트를 원활히 관리하기 위해 노션을 개설했다. 이 팀과 프로젝트를 잘 유지하기 위해 손을 놓아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쏟고, 소통을 이어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다들 생업이 따로 있고, 일상의 루틴이 있는 만큼 사이드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끌고 가려면 모두의 안에서 Remy가 존재감 있게 자리할 수 있어야 한다. 팀원 모두가 한국, 일본, 대만 등 세계 각지에 떨어져 있는 만큼 확실하고 지속적인 연락 일정을 빠르게 약속해야 한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에 앞으로 있을 국제 원격 작업을 염두에 두고, 각자 과거의 국제 협력 작업에서 어려웠던 점들에 대해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프로젝트 초반, 앞으로 할 일과 비전을 세우는 단계는 즐겁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단계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 명료히 해두지 않은 영역은 중후반부까지 가서도 해결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 때까지 끌고가는 것은 마치 매일 아침 조깅을 가기로 새해 목표를 세우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말은 쉽지만 정작 해내기가 쉽지 않은 점이야 말로 목표 설정의 함정이다. 현재 내 목표는 이 조깅을 무사히 연말까지 해내고자 하는 것이다. FtO에서 만난 소중한 팀은 인연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지만, 이 경험이 끝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향후의 지속적인 노력만이 이 계기의 가치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었는지를 결정짓는다고 믿는다.

▶프로젝트는 이후 FtO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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